수성고량주의 역사
수성고량주의 태동장소인 기린원은 지역 최고 예식장과 요리점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원래 이 자리는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경구씨의 아들 조영삼씨가 소유했던 양조장으로 1958년, 이경문씨와 주물공장 “쌍화영”의 화교, 구비소(邱丕昭)씨가 수성고량주의 전신일 빼갈공장 만생주점(萬生酒店)을 설립하였다.
(1952년 주류제조업자명부에는 이진홍의 동천백주양조장이 유일의 고량주회사로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만생주점의 전신인 것으로 보인다.)
사장 이경문은 원래 염매시장 근처에서 잡화상을 하다가 이곳에 만생주점을 열게 되었는데 이후 중국식당인 ‘기린원’을 세우고 만생주점은 원대동, 무태 근처로 이전하면서 ‘수성고량주’로 변신한다.
당시의 수성고량주는 전국적으로 꽤나 유명했으며 지금도 전통공법으로 만들었던 빼갈(고량주)로 맥을 이어오고 있어 유명하다.[출처 : 대구신택리지]
대구는 술이 익어가는 낭만의 도시였다.
근대, 대구의 양조장을 총 39개사나 되었다. 탁주 20개소, 소주 6개소, 청주 6개소 위스키 4개소, 재제주 1개소와 고량주양조장도 1개소 있었다.(주류제조업자명부, 1952, 부산사세청관내)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이 운영했던 조선양조주식회사(대구 중구 대신동 115-1)와 전국 유일한 고량주제조회사 동청백주 양조장(대구시 중구 동문동 38, 수성고량주전신)이 유명했다.
이 때 대다수의 공장은 탁주와 약주를 생산하였지만 고급주로 볼 수 있는 소주와 위스키, 고량주 등 증류주 양조장이 11개나 있었다는 것은 근대화된 대구의 한 모습이다.
1차 발효된 술을 증류하는 기술은 까다롭기도 하지만 일정시설을 갖추어야 제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빼갈로도 불리던 고량주는 지금의 고급 양주와 와인 이상의 최고급주로 대우를 받아 시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던 술이였다.